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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우리시대>
욕망의 식민지서 저항을 욕망하라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들이 넘실거린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뚜렷한 요소들 중 하나는 욕망이다. 물론 욕망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이 시대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태들은 각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 인간은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등의 양상들(현실, 가능, 필연 등)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 양상들이 처하게 되는 맥락들과 그것들 자체가 맺는 관계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해야 한다”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신 “~하고 싶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욕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불황기를 맞아 더욱 더 기형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인간이란 자신의 내부가 의지(意志)하는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욕망은 과연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자신이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내면화한(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인) 결과들일 뿐이다. 사람들이 옷을 살 때 신경 쓰는 것은 그 옷이 내게 편할까 하는 것보다는 남이 이 옷을 입은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기를 쓰고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것도 실제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할 때조차도 사람들은 타인들이 바라보는 자기 배우자의 모습을 통해서 그 결혼의 의미를 가늠하게 된다. 인간은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타인의 욕망을 가늠하는 잣대, 곧 자신이 타인의 욕망을 간파해내는 잣대는 타인의 눈길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통해서 자신을 판단한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한 인간의 눈길 속에는 그 눈길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판단·감정·요구… 등이 모두 깃들어 있다. 그래서 타인의 눈길은 자신의 거울과도 같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판단하듯이, 타인의 눈길을 보고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판단한다. 타인의 눈길에 비친 자기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기이다.


*타인의 눈길로 욕망하는 인간

 그러나 여기에서 타인의 눈길이란 반드시 물리적 눈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현존(現存)하지 않을 때에도,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마주대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대접’은 곧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눈길이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 회사에서 받는 ‘대우’… 등등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대접·대우는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눈길이 모두 모여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다. 그 거대한 눈은 타인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우리는 그 눈을 ‘사회’라고 부른다.


 이 보이지 않는 눈, 거대한 눈길은 어떤 이름에 응축된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명사이지만, 동물·가구… 같은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일정한 자리를 함축하는 이름이다. 회사에서 계장·과장·부장… 같은 이름들은 타인들의 다른 눈길, 사회의 다른 대우를 함축하는 이름들이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이름을 욕망하게 된다. 예컨대 의사·변호사·사장… 같은 이름들은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이름들이다. 타인들은 이 이름들을 욕망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들이 욕망하는 이 이름들을 욕망하게 된다. 어디에 가나,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이 이름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조선 시대에는 태어날 때 이미 이런 이름들을 가지게 된다. ‘이’(李), ‘김’(金), ‘박’(朴) 등의 이름(즉 성)은 이미 한 인간을 사회의 어떤 자리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이름들이 생겨났다. ‘~대학(출신)’, ‘~회사’… 등등. 이 수많은 이름-자리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거기에서 응축되는, 곧 타인들의 욕망이 응축되는 곳이고, 그래서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욕망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름-자리들은 일정한 체계를 구성한다. 소위·중위·대위… 같은 이름-자리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정한 유기적 체계를 구성한다. 체계를 구성하기에 눈길들로 기능한다.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각각이 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즉 하나의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그것의 자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단순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욕망과 권력의 놀이를 함축하는 체계이기에 차라리 체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타인들의 눈길은 일정한 체제를 형성한다. 즉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무엇이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드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왜 우리는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런 이름-자리들이 체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이런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두 권력은 국가장치와 자본주의이다. 국가장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이름-자리들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이 욕망 서열화·체계화

 20세기 중엽 마르크시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학교·군대·공장·병원·회사·종교단체… 같은 장치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 불렀다.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이 국가장치라는 대타자들(커다란 타자들)­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것들은 타자들이다. 그런 타자들 중 국가장치들은 커다란 타자들이다­에서 어떻게 소주체들(작은 주체들)로 길러지는가를 규명했다. 학교·군대… 같은 대타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부를 때)­“조국이 너를 부른다!”­ 우리는 그 대타자들이 길러내는 소주체가 된다. 알튀세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과 상보적이다. 푸코가 우리를 소주체로 길러내는 훈육장치들을 역사·시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면, 알튀세는 국가장치들을 사회·공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고 하겠다. 우리의 욕망은 이 훈육장치들/국가장치들 속에서 길들여지고 박제화된다.


 마치 타원의 두 초점처럼, 국가장치와 더불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이다. 근대적 국가장치와 쌍둥이로 태어난 자본주의 체제는 오늘날 국가(‘국민국가’)와 복잡미묘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지배하고 있다.


*국가·자본이 욕망을 길들여


 자본주의는 얼핏 우리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등 기존의 사회들과는 달리 결코 욕망을 부정하거나 누르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공기나 물과도 같다 해야 할 현대 문화를 창조해냈다.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발달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날개이다. 자본주의는 컴퓨터·휴대전화… 같은 테크놀로지들과 스포츠·연예… 같은 대중문화들을 두 날개로 삼아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욕망을 부추기고 조작해낼 뿐 긍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돈이 되는 욕망(대중의 욕망)만을 긍정한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쥐어짜듯이 우려내 돈을 포획해 간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주의의 욕망은 대중의 욕망을 식민화해 우려 짜낸다. 천박한 욕망의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다.


 전통 문화에서 천박한 욕망에의 저항은 대부분 욕망의 제어(유교)와 제거(불교)를 통해서 추구되었다. 우리말 ‘욕망’이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면서 사용되는 것은 이런 전통 문화의 영향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라는 고전적인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들에 대응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욕망에 저항하는 다른 욕망, 저항하는 욕망, 건강한 욕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배하려는 욕망과 천박한 욕망에 저항하는 위대한 욕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사상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입장에서 ‘욕망의 철학’을 전개했다. 전자의 길(욕망을 비우라는 전통사상의 가르침)을 우리는 ‘소요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길(권력의 욕망과 싸우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가르침)을 ‘투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이 두 길 사이에서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by 단미 | 2009/03/18 15:27 | 트랙백 | 덧글(0)
<키워드로 읽는 우리 시대>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

  관련기사

  • 담론의 매혹 주체들의 백가쟁명

  • 담론의 역사적 흐름 ‘진맥’


     1980년대를 주도했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였다. 1990년대에 도래한 새로운 현실을 개념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미셸 푸코(1926~1984)다. 푸코의 영향은 너무나도 강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의 어휘들이나 사고방식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담론’이라는 말을 늘 쓰면서도 이 말의 현대적 의미를 푸코가 내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어버리곤 한다.


     광인들·환자들·범죄자들을 비롯해 숱한 ‘타자들’의 세계를 파고들었던 푸코는 생애 한가운데에 도달했을 때 <지식의 고고학>(1969, 한국어판:이정우 옮김·민음사)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푸코는 자신의 작업을 가능케 한 인식론적 토대를 점검하면서 언표, 담론, 역사적 아프리오리, 문서고 등의 개념들을 비롯해 많은 중요한 개념들을 다듬어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저작은 푸코 사유의 ‘중간 점검’이며, 그의 방법론을 상세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저작이기도 하다. 때문에 푸코의 저작들 중 특이하게 추상적이고 난해하다.


     푸코는 여기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지적 장, 곧 ‘인식론적 장’을 언급한다. 마르크스와 니체가 남긴 19세기 철학의 유산, 바슐라르와 캉길렘의 인식론, 구조주의와의 친화성과 차이 등 여러 담론사적 맥락들이 서술되고 있으며, 언어분석 철학자들과의 차이 또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푸코 사유가 담론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푸코의 언어철학·인식론·존재론 등, 그의 사유의 심층을 들여다보기 위해 꼭 읽어야 할 명저다.

    by 단미 | 2009/03/18 15:23 | 트랙백 | 덧글(0)
    <코드로 읽는 우리 시대>
    담론의 매혹 주체들의 백가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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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 담론·욕망·해체·노마디즘…. 신문 잡지 등에 자주 언급되고 있어 그 의미를 느낌이나 이미지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규정은 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적지 않다. 그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알면 우리 시대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연재물 ‘코드로 읽는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데 열쇳말이 되는 개념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갖가지 현상들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압축적으로 품고 있는 코드를 풀어내면 우리 시대가 보이고, 동시에 우리 시대의 풍경을 통해 그 코드의 의미를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마당인 셈이다.


    *체험-이론 잇는 언어구성물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징후들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개념들의 변화와 맞물려 전개되는 법이기에,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다채로운 개념들과 함께 도래했다. 처음에는 학술적 차원에서 등장했던 개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19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여러 개념들 중에서 아마도 ‘담론’(discours)이라는 개념만큼 널리 퍼져 일상 언어로 굳어진 개념도 드물 것 같다. ‘담론’이라는 말은 오늘날 도처에서 발견되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어휘가 되었다.

    한 개념이 멀리 퍼져나가면 그 본래의 의미와 맥락이 탈색되어 다소 막연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이런 점에서 ‘담론’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주요 개념들을 검토해 보고 그 의미와 맥락을 점검해 보는 것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하는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일이 될 것이다.


    *책·영상·패션 모든게 담론

    어린 시절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말과 사물 사이의 비중에서 큰 변화가 도래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시골에서 도시로’라는 공간적 이행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리라.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말의 비중이 사물들의 비중을 잠식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산천초목, 가축들, 그리고 집, 외양간, 우물, 리어카… 등을 비롯한 최소한의 인공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시절은 사물들의 시대였다. 말이라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일상어가 전부였다. 그러나 종이와 글의 비중이 점차 커져 간다. 문서들이 가득 쌓인다. 모든 것은 언어를 경과해서야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 그리고 특히 1990년대는 이런 언어적 구성물들이 내용에서나(예컨대 ‘영화학’을 비롯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담론들이 생겨났다), 매체에서나(예컨대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이 등장했다)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불어난 시대였다. 언어로 구성된 것들, 곧 몸으로 겪는 실제 체험과 대비되는 언어적 구성물들을 ‘담론’이라 부른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우리 사회는 담론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왜 ‘담론’일까. 담론 개념의 출현을 이제 다른 방향에서, 다시 말해 위로부터 다시 바라보자. 이전에, 특히 1980년대에 우리는 학문·과학·이론·사상·명제… 등을 이야기했다. 인식론의 맥락에서는 학문과 사회, 이론과 경험, 사상과 현실, 명제와 감각자료(센스 데이터)… 들의 관계를 논했다. 그러나 고도의 사유를 요하는 이론과 몸으로 직접 겪는 체험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중대한 매개물을 빠뜨리는 일이다. 체험과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담론의 공간’을 건너뛰고 마는 것이다. 왜 ‘담론의 공간’을 빠뜨려선 안 되는가? 고도의 이론과 직접적 체험 사이에 각종 체험을 담론화하는 숱한 방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이론’은 우리의 체험, 특히 정치적 체험을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도의 이론적 체계들로 담론화했다. 1990년대는 체험을 담론으로 구성하는 형식들이 비약적으로 증폭한 시대, 또는 이전에 주목받지 않았던 담론 형식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라는 말의 외연이 갑자기 크게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제 의미를 읽어내어야 할 것은 반드시 고도의 이론적 언어들만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언어들, 나아가 영상들, 심지어 패션들까지도 ‘텍스트’가 되었다. 1990년대는 담론적 관점이 사물적-신체적 관점을 뒤덮으면서 모든 것을 ‘문화’의 영역으로 휩쓸어 담기 시작한 시대였다.


    *다원성 옷 입고 문화 대중화

    담론의 시대는 인식론적 상대성이 발견된 시대이기도 하다. 각각의 담론에는 그 코드가 존재한다. 학생들은 1교시에는 사과의 화학적 조성을 배우고, 2교시에는 사과 특산지의 경제 상황과 연계되는 사과를 배우고, 3교시에는 사과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사과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다. 분명 똑같은 그 사과이다. 우리 눈의 구조는 거의 보편적이기에, 사과를 지각한 결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거의 같다. 그러나 그 지각에서 읽어내는 의미, 그 지각을 어떤 형태로든(화학식의 형태로든, 문학적 언어의 형태로든, 그림으로든) 담론화하는 방식은 각 담론마다 모두 다르다. 또 각 담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성격 또한 전혀 다르다. 생물학 시간에는 사물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데이터를 수식이나 화학식으로 표현하는 주체가 전제되고, 반대로 문학 시간에는 사물들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은유를 비롯한 문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주체가 전제된다. 담론의 공간이 달라지면 주체의 성격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의 종류가 비약적으로 증폭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가 인식론에서 상대주의가 첨예한 문제로서 대두된 시기였다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보편성, 객관성은 이제 단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해결해나가야 할’ 무엇이 된 것이다.


    *90년대 이후 백화제방 양상

    이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정치적 다원화와 맞물려 전개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나의 담론은 하나의 사회적 집단을 함축한다. 물리학·생물학… 등의 담론들은 ‘과학자들’이라는 집단을, 시·소설·희곡… 같은 담론들은 ‘문학자들’이라는 집단을, 정치연설문·팸플릿·국회보고서… 같은 담론들은 ‘정치가들’이라는 집단을 함축한다. 담론의 다양성은 사회집단들의 다양성을 함축하며, 또 새로운 담론들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집단의 출현을 함축하는 것이다. 담론을 통해서 하나의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나의 집단이 특정한 담론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표현하기도 한다(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담론들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체적 차원에서의 사회집단들은 담론적 차원에서의 각종 담론들과 맞물려 사회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87년 이후 담론의 시대가 또한 다원화의 시대인 것 또한 조금도 우연이 아니다.


    *이론의 독과점 시대 허물어

    담론의 시대는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글을 읽고 저술을 하는 시대, 고도의 이론과 신체적 체험 사이가 뻥 뚫려 있는 시대가 아니라 모든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담론을 구성해 가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문화 대중화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도래는 인류사의 커다란 성취들 중 하나이다. 


    -이정우 철학자·철학아카데미 원장

    by 단미 | 2009/03/18 15:21 | 인문학자료 | 트랙백 | 덧글(0)
    봄이


    지금은 저 멀리 있는 녀석 ㅠ_ㅠ
    보고 싶다...
    by 단미 | 2009/01/19 00:42 | 소소한일상 | 트랙백 | 덧글(0)
    10월에 구입한 책들

    [트와일라잇]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샀다. 항간의 엄청난 소문 때문에! 팔랑 귀를 가진 내가 그런 어마어마한 유혹을 견딜 리가 없지. 어젯밤에 다시 열심히 읽었는데, 이 소설은 남 주인공 뱀파이어 훈남 '에드워드' 없었으면 백이면 백 쪽박찼다. 나보다 어린 녀석(알맹이는 엄청 늙었지만)이 염장 지르는 말을 늘어놓고 있어. 만약 실제로 남자가 '에드워드'가 뱉은 대사를 읊었다면 대놓고 토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지원 님의 에드워드 일러스트도 인기의 한 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글보다 일러스트가 더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체였다.

     트와일라잇은 확실히 여성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로맨스 소설이다. 현실적인 사랑이라기 보다 여자가 원하는 남성상은 모조리 다 들어있다. 남 주인공만 따진다면 완벽한 러브 판타지랄까.
     여자가 미치고 팔딱 뛰는 에드워드가 가진 매력에 대해 나열하자면...

    1. 나쁜 남자 - 에드워드는 그녀를 볼 때마다 흡혈 충동을 받는다.
    2. 자상한 남자 -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피나는 인내심으로 흡혈 충동을 참는다.
    3. 용감한 남자 -  나의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제대로 확 돌아버린다.
    4. 잘생긴 남자 - 뱀파이어는 원래 잘생겼다.
    5. 능력 좋은 남자 - 뱀파이어는 원래 잘났다.
    6. 몸 좋은 남자 - 그녀는 항상 에드워드의 가슴 근육 타령을 하더라.
    7. 집안 빵빵한 남자 - 가족도 죄다 뱀파이어다.
    .
    .
    .

    등등등. 이 녀석 너무 잘났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의 원작 소설. 안 읽어서 잘 모르겠는데, 코맥 매카시는 [로드]의 작가니 함 기대하려고... 약간 마초 성향이 섞여있을까 우려 중.

     [보너스 트랙] 코시가야 오사무 지음.

     16회 일본판타지소설 대상 우수상 수상작이라는데 안 읽어서 모름.
    by 단미 | 2008/10/04 08:26 | BOOK DIARY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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