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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쌈넷에서 알게 되었..by 류리 at 06/05 ㅎㅎㅎㅎㅎㅎㅎㅎㅎ by 류리 at 06/0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y Gnossienne at 06/05 제 경우 도나웨일은 위.. by Gnossienne at 04/28 |
욕망의 식민지서 저항을 욕망하라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들이 넘실거린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뚜렷한 요소들 중 하나는 욕망이다. 물론 욕망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기에 이 시대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태들은 각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 인간은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등의 양상들(현실, 가능, 필연 등)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 양상들이 처하게 되는 맥락들과 그것들 자체가 맺는 관계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하면서 “~해야 한다”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신 “~하고 싶다”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욕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불황기를 맞아 더욱 더 기형화되어 가는 우리 시대 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여기에서 타인의 눈길이란 반드시 물리적 눈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현존(現存)하지 않을 때에도,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마주대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대접’은 곧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평균적 눈길이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 회사에서 받는 ‘대우’… 등등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회적 대접·대우는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눈길이 모두 모여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다. 그 거대한 눈은 타인들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우리는 그 눈을 ‘사회’라고 부른다.
20세기 중엽 마르크시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던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학교·군대·공장·병원·회사·종교단체… 같은 장치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 불렀다. 그는 한 사람의 개인이 이 국가장치라는 대타자들(커다란 타자들)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것들은 타자들이다. 그런 타자들 중 국가장치들은 커다란 타자들이다에서 어떻게 소주체들(작은 주체들)로 길러지는가를 규명했다. 학교·군대… 같은 대타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부를 때)“조국이 너를 부른다!” 우리는 그 대타자들이 길러내는 소주체가 된다. 알튀세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과 상보적이다. 푸코가 우리를 소주체로 길러내는 훈육장치들을 역사·시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면, 알튀세는 국가장치들을 사회·공간적인 지평에서 규명했다고 하겠다. 우리의 욕망은 이 훈육장치들/국가장치들 속에서 길들여지고 박제화된다.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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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매혹 주체들의 백가쟁명
담론·욕망·해체·노마디즘…. 신문 잡지 등에 자주 언급되고 있어 그 의미를 느낌이나 이미지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규정은 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적지 않다. 그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알면 우리 시대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연재물 ‘코드로 읽는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데 열쇳말이 되는 개념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갖가지 현상들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압축적으로 품고 있는 코드를 풀어내면 우리 시대가 보이고, 동시에 우리 시대의 풍경을 통해 그 코드의 의미를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마당인 셈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징후들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개념들의 변화와 맞물려 전개되는 법이기에,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다채로운 개념들과 함께 도래했다. 처음에는 학술적 차원에서 등장했던 개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19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여러 개념들 중에서 아마도 ‘담론’(discours)이라는 개념만큼 널리 퍼져 일상 언어로 굳어진 개념도 드물 것 같다. ‘담론’이라는 말은 오늘날 도처에서 발견되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어휘가 되었다. 한 개념이 멀리 퍼져나가면 그 본래의 의미와 맥락이 탈색되어 다소 막연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이런 점에서 ‘담론’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주요 개념들을 검토해 보고 그 의미와 맥락을 점검해 보는 것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하는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말과 사물 사이의 비중에서 큰 변화가 도래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시골에서 도시로’라는 공간적 이행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리라.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말의 비중이 사물들의 비중을 잠식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산천초목, 가축들, 그리고 집, 외양간, 우물, 리어카… 등을 비롯한 최소한의 인공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시절은 사물들의 시대였다. 말이라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일상어가 전부였다. 그러나 종이와 글의 비중이 점차 커져 간다. 문서들이 가득 쌓인다. 모든 것은 언어를 경과해서야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 그리고 특히 1990년대는 이런 언어적 구성물들이 내용에서나(예컨대 ‘영화학’을 비롯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담론들이 생겨났다), 매체에서나(예컨대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이 등장했다)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불어난 시대였다. 언어로 구성된 것들, 곧 몸으로 겪는 실제 체험과 대비되는 언어적 구성물들을 ‘담론’이라 부른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우리 사회는 담론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왜 ‘담론’일까. 담론 개념의 출현을 이제 다른 방향에서, 다시 말해 위로부터 다시 바라보자. 이전에, 특히 1980년대에 우리는 학문·과학·이론·사상·명제… 등을 이야기했다. 인식론의 맥락에서는 학문과 사회, 이론과 경험, 사상과 현실, 명제와 감각자료(센스 데이터)… 들의 관계를 논했다. 그러나 고도의 사유를 요하는 이론과 몸으로 직접 겪는 체험 사이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중대한 매개물을 빠뜨리는 일이다. 체험과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담론의 공간’을 건너뛰고 마는 것이다. 왜 ‘담론의 공간’을 빠뜨려선 안 되는가? 고도의 이론과 직접적 체험 사이에 각종 체험을 담론화하는 숱한 방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이론’은 우리의 체험, 특히 정치적 체험을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도의 이론적 체계들로 담론화했다. 1990년대는 체험을 담론으로 구성하는 형식들이 비약적으로 증폭한 시대, 또는 이전에 주목받지 않았던 담론 형식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라는 말의 외연이 갑자기 크게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연계되어 있다. 이제 의미를 읽어내어야 할 것은 반드시 고도의 이론적 언어들만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언어들, 나아가 영상들, 심지어 패션들까지도 ‘텍스트’가 되었다. 1990년대는 담론적 관점이 사물적-신체적 관점을 뒤덮으면서 모든 것을 ‘문화’의 영역으로 휩쓸어 담기 시작한 시대였다.
담론의 시대는 인식론적 상대성이 발견된 시대이기도 하다. 각각의 담론에는 그 코드가 존재한다. 학생들은 1교시에는 사과의 화학적 조성을 배우고, 2교시에는 사과 특산지의 경제 상황과 연계되는 사과를 배우고, 3교시에는 사과에 대한 각자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사과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다. 분명 똑같은 그 사과이다. 우리 눈의 구조는 거의 보편적이기에, 사과를 지각한 결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거의 같다. 그러나 그 지각에서 읽어내는 의미, 그 지각을 어떤 형태로든(화학식의 형태로든, 문학적 언어의 형태로든, 그림으로든) 담론화하는 방식은 각 담론마다 모두 다르다. 또 각 담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성격 또한 전혀 다르다. 생물학 시간에는 사물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데이터를 수식이나 화학식으로 표현하는 주체가 전제되고, 반대로 문학 시간에는 사물들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은유를 비롯한 문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주체가 전제된다. 담론의 공간이 달라지면 주체의 성격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의 종류가 비약적으로 증폭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가 인식론에서 상대주의가 첨예한 문제로서 대두된 시기였다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보편성, 객관성은 이제 단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해결해나가야 할’ 무엇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정치적 다원화와 맞물려 전개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나의 담론은 하나의 사회적 집단을 함축한다. 물리학·생물학… 등의 담론들은 ‘과학자들’이라는 집단을, 시·소설·희곡… 같은 담론들은 ‘문학자들’이라는 집단을, 정치연설문·팸플릿·국회보고서… 같은 담론들은 ‘정치가들’이라는 집단을 함축한다. 담론의 다양성은 사회집단들의 다양성을 함축하며, 또 새로운 담론들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집단의 출현을 함축하는 것이다. 담론을 통해서 하나의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하나의 집단이 특정한 담론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표현하기도 한다(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담론들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체적 차원에서의 사회집단들은 담론적 차원에서의 각종 담론들과 맞물려 사회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87년 이후 담론의 시대가 또한 다원화의 시대인 것 또한 조금도 우연이 아니다.
담론의 시대는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글을 읽고 저술을 하는 시대, 고도의 이론과 신체적 체험 사이가 뻥 뚫려 있는 시대가 아니라 모든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담론을 구성해 가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문화 대중화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도래는 인류사의 커다란 성취들 중 하나이다.
[트와일라잇]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샀다. 항간의 엄청난 소문 때문에! 팔랑 귀를 가진 내가 그런 어마어마한 유혹을 견딜 리가 없지. 어젯밤에 다시 열심히 읽었는데, 이 소설은 남 주인공 뱀파이어 훈남 '에드워드' 없었으면 백이면 백 쪽박찼다. 나보다 어린 녀석(알맹이는 엄청 늙었지만)이 염장 지르는 말을 늘어놓고 있어. 만약 실제로 남자가 '에드워드'가 뱉은 대사를 읊었다면 대놓고 토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지원 님의 에드워드 일러스트도 인기의 한 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글보다 일러스트가 더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체였다. 트와일라잇은 확실히 여성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로맨스 소설이다. 현실적인 사랑이라기 보다 여자가 원하는 남성상은 모조리 다 들어있다. 남 주인공만 따진다면 완벽한 러브 판타지랄까. 여자가 미치고 팔딱 뛰는 에드워드가 가진 매력에 대해 나열하자면... 1. 나쁜 남자 - 에드워드는 그녀를 볼 때마다 흡혈 충동을 받는다. 2. 자상한 남자 - 그럼에도 에드워드는 피나는 인내심으로 흡혈 충동을 참는다. 3. 용감한 남자 - 나의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제대로 확 돌아버린다. 4. 잘생긴 남자 - 뱀파이어는 원래 잘생겼다. 5. 능력 좋은 남자 - 뱀파이어는 원래 잘났다. 6. 몸 좋은 남자 - 그녀는 항상 에드워드의 가슴 근육 타령을 하더라. 7. 집안 빵빵한 남자 - 가족도 죄다 뱀파이어다. . . . 등등등. 이 녀석 너무 잘났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의 원작 소설. 안 읽어서 잘 모르겠는데, 코맥 매카시는 [로드]의 작가니 함 기대하려고... 약간 마초 성향이 섞여있을까 우려 중. [보너스 트랙] 코시가야 오사무 지음. 16회 일본판타지소설 대상 우수상 수상작이라는데 안 읽어서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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